2011년 9월 24일 토요일

SM 영화, 또는 포르노에 대하여 ... 마광수





페미니스트들은 '좋은 포르노'와 '나쁜 포르노'를 구분해 왔다. 그러나 내 생각엔 '나쁜 포르노'가 '좋은 포르노'보다 진실에 가깝다.

페미니스트들은 서로 배려하고 교감을 나눈다면 성기 결합의 장면이 노출돼도 좋은  포르노에 속하며, 위험하고 일탈적이며 여성에게 치욕과 고통을 주는 성행위를 촬영했다면 나쁜 포르노의 전형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를 펴는 진영에는 서양엔 앤드리아 드워킨, 로빈 모건,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과 한국의 구성애 등이 포진해 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본디지(bondage 상대를 묶기)와 디서플린(discipline 상대를 때리기) 포르노가 넘치는 이 세상은 미쳤으며, 그것을 즐기는 인간들은 '괴물'인 셈이다. 그러나 나쁜 포르노를 옹호하는 한국의 유일한 괴물로는 교수라는  '고상한 직업'을 가진 내가 있다. 나는 지독한 SM 포르노그래피를 옹호한다. 나의 논리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성적 에너지는 본래 반사회적이고 반도덕적이다. 즉 소아성욕과 공격성, 가학적 격정 등은 에로티시즘의 주된 요소다. 그렇다면 '나쁜 포르노'도 배우들이 서로를 배려하는 좋은 포르노만큼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된다. 아울러 인간마다 다양한 성적 취향과 주관적 해석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가령 밧줄에 묶인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치욕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의 의무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적 행복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마치 어린애가 전능한 어머니의 품속에 안겨(갇혀) 행복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상대를 묶는다는 것이야말로 뜨거운 포옹만큼이나 사려 깊은 배려가 되는 셈이다.>

사실 위험하고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포르노 전체를 옹호할 수야 없다. 그렇지만 인간의 에로티시즘을 숭고한 것으로 이상화하는 편향도 촌스럽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을 추악한 존재로 이해할 때 이른바 '고상한' 걸작 예술의 감상이 손쉬워진다는 점이다. 일본 영화 <감각의 제국>은 여성이 남자의 성기를 짜르는 사디즘을 묘사했지만 지금은 걸작 영화로 정평이 나있다.

프랑스 영화 <로망스>의 여주인공은 진실한 사랑과 섹스를 갈구하지만, 결국 여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팔다리를 묶고 모욕하는 가학 성향의 남자에게 매료된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스트리아 여성작가 옐리네크의 소설을 영화화한 <피아니스트>의 여주인공도 클래식 피아노를 가르치는 '고상한 교수'지만, 기괴할 정도로 피학적이다. 이들 영화가 인간의 성적(性的) 피학 욕망을 과장했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영원한 사랑'을 외쳐대는 흔해 빠진 로맨틱 드라마들에 비하면 거짓말의 수위가 한참 낮은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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