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8일 토요일

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나 개념 속에서 시대의 여러 이데올로기 등과 결합되어 제한적인 인식으로 고착화되어 있는 모습을 우리는 먼저 발견해야 한다.



우리 한의원 부원장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수염을 길러 보고 싶어서 한 3주 수염을 깎지 않고 기르는 중에 장인어른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장인께서 어른 앞에서 그 무슨 예의 없는 짓이냐며 나무라셔서, 하는 수 없이 수염을 깎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난 이런 말을 했었다.


“참 이상하지,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수염을 깎고 다녔다면, 이런 호로자식(胡虜子息)이 어디 있냐며 난리가 났을 텐데 말이야. 督택섰揷?수지부모, 불감훼상이 효지시야(身體髮膚 不敢毁傷 孝之始也)鸞?하면서 말이야. 심지어 내 목을 자를지언정, 내 머리칼은 자르지 않겠다고 호령하던 모습이 선비의 기상을 보여주는 명언이었는데 말이지.”


우리의 역사 속에서만 해도 성에 대한 인식은 그 시대의 통치원리에 따라 여러 가지 변화와 굴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보다는 오히려 훨씬 성에 대한 인식이 열려 있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서양에서도 중세 기독교 영향 하에서는 여성이 자위하는 모습을 들키면 화형에 처했다. <풍속의 역사>나 <세계 풍속사> 등을 보면, 역사의 여러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시간과 공간의 지배계급의 통제원리가 그 사회의 성 인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여러 증거들이 나온다.


이런 시간과 공간의 제한성을 벗어나서, 성 그 자체의 본질을 이해하자면 결국 인간 본질에 대한 이해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게 사실이다. 인간의 궁극적 본질과 연결된 성 이해의 연구와 실천, 수행에는 도가의 성도인술, 힌두교, 불교의 탄트라가 가장 잘 설명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몸은 영혼의 전당이며, 우주의 축소판이다. 탄트라에서는 “어떠한 성전도 성스러운 몸을 능가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서구의 전통에서는 사람의 영혼은 육체보다 더 소중하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억압받는 모든 것은 보편적으로 위기가 오면 허물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탄트라에서는 해방을 위해서 우리가 정신, 신체, 두뇌, 마음을 이용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고양된 목적을 위하여 우리의 존재를 신성화시킴으로써 우리는 이것들을 하나의 통합체로 만들 수 있다. 


개인의 성장은 버릇을 바꿈으로서 가속화 할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을 고칠 수 없어. 나는 항상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한단 말이야.” 라고 말하거나 생각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제일 먼저 고쳐야 할 버릇이다. 성행위의 버릇으로부터 탈피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성행위의 버릇이 가장 나쁘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행하는 행위는 습관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행위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탄트라식 방법에서는 완전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성의 수수께끼에 대한 동양의 가르침은 다양성과 억압받지 않는 자발성의 필요를 지적하고 있다.


또한 자기의 점검이 발전적인 사랑의 행로에 필수인데, 오직 정직한 환경에서만 우리의 성장에 무의식적인 장애물이 제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를 반영하기 위해서 우리의 의식을 내적으로 기울일 때 새로운 감각이 펼쳐진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이기적인 환상의 투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탄트라의 이상인 쾌적하고 자발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대신, 어떤 관계가 제한되었다면 그 연인끼리는 해결할 수 없는 갈등에 끌려 다니게 된다.


그리고 성별에 대한 개방된 자세로 모든 인간이 자연스런 양성적(兩性的)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부부는 성행위 시 인식의 폭을 넓게 가져야 하며, 모든 남성 안에 여성이 존재하고 모든 여성 안에 남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자연스럽게 성 역할을 바꾸어야 한다.


도가에서도 “신비한 성 실천을 할 때 역할 바꾸기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남성이 유순한 반면 여성은 공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성 역할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자발성을 인정해서 관계를 풍성히 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은 연인과 다른 여성들 그리고 자신 속에 존재하는 음(陰)의 원칙을 존경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자신의 특성을 잘 인식하고, 그것들을 구체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성은 또한 유일한 창조적 힘 즉 샥티(shakti)의 양쪽을 만족시키는데 도움을 주면서 연인 안에 존재하는 ‘내부 여성’과 관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남성이 자발적으로 연인을 최고 샥티의 구현이라고 생각할 때, 창조적 여신인 그녀는 순수한 신념과 헌신, 즉 박티(bhakti)로서 응답한다.


여성은 남성을 사랑의 신비로 이끄는 고귀한 성녀(聖女)이자 전수자(傳授者)로 탈바꿈한다. 남성은 그때 여성의 주인이자, 애인의 모습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전통적인 비전은 인간의 정신에서 유전된 거대한 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탄트라에서는 이 힘을 ‘내부의 여성’ 또는 ‘쿤달리니 샥티’라고 지칭하는데 똬리를 튼 무서운 뱀과 관련이 있다. 보통 보이지 않는 이 힘은 창조적으로 혹은 파괴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성 접촉은 특히 내재하는 쿤달리니를 자극하고 일깨우기 쉽다. 연인들은 때때로 성행위를 하는 동안 생명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일치되어 자발적으로 쿤달리니를 일깨우는데 필요한 조건을 연출해 낼 수도 있다.


깊은 호흡, 성기 부위의 운동, 생명호흡의 합체와 교환, 끙끙거리는 소리, 그 밖에 다른 소리(음. 아. 우 등과 같은)가 뱀의 힘을 자극하는 요소이다.


일깨워진 쿤달리니가 일어나는 경험은 명백하다. 그것은 내적인 흥분으로 액체의 불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뜨겁고 차가우며 전기 같다. 마비를 일으키기도 하며, 모든 존재를 활짝 열어 놓으며, 가볍고 자유로우며, 숨을 옮기기도 한다. 때때로 쿤달리니를 일깨운다는 것은 두려운 경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올바른 정신 자세를 갖고 있다면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보내는 것은 쉽다. 만일 쿤달리니가 자발적이고 즐거운 성행위를 통해서 일깨워졌다면, 그것은 부부에게 영혼의 극점을 탐구 할 수 있는 커다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탄트라적 성행위를 하는 부부에게 있어서 쿤달리니는 기쁨과 해방을 안겨 주는 협조자이다.


그녀(쿤달리니)의 힘은 생물적인 본능을 초월의 욕구로 바꿔 준다.


당신과 당신의 연인에게 내재한 쿤달리니를 심상(心象)하라.


그녀(쿤달리니)를 위로 여행을 통하여 조심스럽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인도하라.


그녀(쿤달리니)를 성기에서부터 머리의 왕관에 이르기까지 결합으로 인도하라. 그러면 당신의 심장은 시바(shiva)와 샥티(shakti)의 즐거운 에너지로 넘칠 것이다. 세상의 애착과 이중성으로부터 해방되어 기쁨이 커진다는 것을 심상(心象)하라. 『성의 비밀』 닉 더글라스 저, 이의영 옮김, 하남출판사, pp.174~176


이상이 탄트라에서 보는 성의 본질에 대한 표현을 간략히 줄여 본 것이다. 처음엔 생소하거나, 어려운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탄트라 섹스를 하면서 생활하다 보면, 이 모든 구절구절이 살아 숨쉬는 운율로 들리며 아름답고도 정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성 에너지의 본질은 우리의 근원 창조 에너지이자 기쁨 에너지이고, 또 사랑 에너지로, 영성 에너지로 변형될 수 있는 보물이다. 우리가 보통 성의 세계를 초월해야 한다고 하는 것도, 성을 충분히 이해해야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성을 외면하는 것과 초월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목표가 각자 다다를 수 있다. 또 사람마다 근기와 능력이 다를 수도 있다. 우리의 목표가 큰 기쁨이든, 건강이든, 넘치고 가득 찬 사랑의 물결이든, 신성과 하나 되는 영성(靈性)이든, 나는 이 모든 경우에, 성의 본질의 이해와 성 에너지의 운용법을 익히는 것은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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